스페인북부 미식 여행 (산세바스티안, 핀초스, 미슐랭)

저는 스페인이 미식의 나라라는 말과 별개로 스페인 여행지에서 좋은 경험만 할수 있을거라 기대하지않았습니다. 오기 전부터 동양인여행자를 상대로 절도, 소매치기, 렌트카 부시기 등 많은 후기를 접하면서 이미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거든요. 저 역시 바르셀로나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렌트카에 있던 캐리어를 통째로 도둑맞고, 자전거는 바퀴만 남긴 채 사라졌고, 긴축재정으로 마감 세일 스시롤 하나로 하루를 버텼습니다. 그 상황에서 음식이 맛있을 리 없었겠지만, 사실 맛 자체도 그렇게까지 감동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를 벗어나 스페인 북부로 이동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완전히 잘못된 곳에서 스페인 음식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바르셀로나에서 산세바스티안으로 — 같은 나라인데 다른 세계

바르셀로나에서 저는 10유로(약 16,000원)로 하루 식비와 기타 비용을 전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숙박비만 13유로였으니 식비로 쓸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마감 세일로 내놓은 5.2유로짜리 스시롤을 사면서 '이게 오늘 식사구나' 싶었습니다. 맛이 완전히 나쁘진 않았지만, 제 돈 주고 다시 사 먹을 맛은 아니었습니다.

치안도 문제였습니다. 자전거를 반납하러 갔더니 바퀴만 빼고 훔쳐간 상태였고, 숙소 밖에는 눈에 띄게 수상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렌트카 도난으로 원래 계획했던 스페인 일주 일정이 전부 취소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비행기를 끊어 가장 가고 싶었던 도시 하나만 찍기로 했고, 그게 산세바스티안이었습니다.

부엘링 저가항공으로 70분. 내려서 처음 든 생각은 '여기는 다르다'였습니다. 공항 수하물 찾는 곳에 리모와 캐리어가 주인 없이 그냥 놓여 있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핸드폰 하나도 절대 자리 비워 충전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긴장 자체가 필요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시내로 들어올수록 탁 트인 거리, 수상해 보이는 사람 한 명 없는 골목.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산세바스티안이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단위 면적당 미슐랭 레스토랑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시입니다. "맛없는 음식을 먹고 가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곳입니다.

요약: 바르셀로나의 도난·긴축재정·치안 불안에서 벗어나 산세바스티안으로 이동하자마자 분위기와 안전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핀초스 문화를 몰랐던 제가 처음 알게 된 것들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 골목에 들어가면 줄 서있는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저도 사람이 많은 곳에 그냥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핀초스란, 스페인 바스크 지방 특유의 소량 음식 문화로, 타파스와 비슷하지만 주로 빵 위에 올려 먹거나 작은 접시 단위로 제공되며, 여러 가게를 옮겨 다니면서 먹는 방식이 정석입니다. 주문할 때 이름을 말하고, 직원이 이름을 부르면 카운터로 가서 받아오는 구조입니다.

처음 들어간 타파스 바에서 메뉴 4개를 시켰더니 총 29.8유로, 약 48,000원이 나왔습니다. 소 뽈살, 돼지 귀, 리조또, 푸아그라였습니다. 소 뽈살은 진한 갈비찜과 장조림의 중간 어딘가였고, 돼지 귀는 제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녹진하고 바삭하며 양념도 좋았습니다. 소 뽈살은 먹어본 맛이었는데 돼지 귀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습니다.

리조또는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있으면서 수분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진하지도 않고 되지도 않은, 수분만 가득 품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쫄깃함이었습니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먹고 느껴야 하는 종류의 식감이었습니다. 그리고 푸아그라. 여기서 푸아그라란, 오리나 거위의 간을 비대하게 키운 식재료로, 유럽에서는 대중적이지만 한국에서는 접근성이 낮고 가격도 비싼 고급 재료입니다. 그런데 산세바스티안에서는 3.5유로에서 6.5유로(약 5,700원~10,000원) 사이에 어디서든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김밥 먹듯이 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줄이 길게 늘어선 가게가 있었습니다. 바스크 치즈케이크 원조 가게였습니다. 1인분에 6유로, 2조각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바스크 치즈케이크란, 산세바스티안에서 처음 만들어진 치즈케이크로, 겉은 짙게 태우고 속은 크리미하게 남기는 게 특징입니다. 원조답게 엄청 꾸덕하지는 않았지만 신선한 치즈의 맛이 그대로 느껴졌고, 제가 상상했던 유럽 분위기가 딱 여기서 맞아 떨어졌습니다. (출처: 스페인 관광청)

  • 핀초스 바 이용 방법: 주문 시 이름을 말하고, 직원이 이름을 부르면 카운터에서 직접 받아 서서 먹는 방식입니다.
  • 가격대: 메뉴 4개 기준 약 29.8유로(48,000원), 평균적으로 한 끼에 20유로(3~4만원) 안팎으로 해결 가능합니다.
  • 먹는 방식: 한 가게에서 2~3개 먹고 옆 가게로 이동하는 것이 현지 정석입니다. 혼자 와도 여러 메뉴를 소량씩 즐길 수 있어 1인 여행자에게 특히 좋습니다.
  • 바스크 치즈케이크 원조: 구시가지 내 위치. 1인분(2조각) 6유로. 줄이 길더라도 회전율이 빠릅니다.
요약: 핀초스 바 문화는 소량·다품종·이동식 식사 방식으로, 1인 여행자도 한 끼에 20유로대에 고급 재료를 다양하게 먹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미슐랭 식당을 골목에서 3유로에 먹는 게 가능한 도시

이틀째에는 산세바스티안 음식점 전체 매출 1위라는 가게에 오후 5시 반에 일찍 들어갔습니다. 성게알 크림 핀초스를 시켰는데, 솔직히 성게알 향이 거의 안 났습니다. 색깔이 단호박 같고 크림 느낌이었습니다. 반면 게살 타르트는 달랐습니다. 조개 껍데기 안에 게살을 담아낸 것인데, 꽃게된장찌개에서 알이랑 살을 다 발라 밥 비벼 먹는 맛이었습니다. 전형적인 밥도둑 맛입니다.

그 옆에서 시킨 버거 패티는 미디엄레어로 나왔는데, 스테이크처럼 부드러웠습니다. 푸아그라 핀초스는 3.5유로. 다 합쳐도 18.8유로, 약 3만원이었습니다.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다리를 건너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모던한 인테리어에 밝은 조명, 직원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가게도 있었습니다. 스페인 미슐랭(랩솔) 등재 가게에서 멸치, 오징어, 대구 요리를 추천받아 시켰는데, 멸치는 꽈리고추 멸치볶음 향과 똑같았고, 대구는 동태전 살을 부드럽게 발라 양념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랩솔이란, 미쉐린 가이드와 함께 스페인에서 권위 있는 미식 평가 가이드로, 현지에서는 미쉐린 못지않게 신뢰받는 레스토랑 인증 기준입니다. (출처: Guía Repsol 공식 사이트)

마지막 날 저녁에는 버섯과 노른자를 비벼 먹는 메뉴로 유명한 곳에 갔습니다. 노른자를 터트려 여러 종류의 버섯과 섞어주는 요리였는데, 버섯마다 향과 맛이 달랐습니다. 고사리처럼 엄청 부드러운 것도 있었고, '나 버섯 좋아했었나?' 싶어지는 종류였습니다. 거기에 푸아그라가 함께 나왔는데, 산세바스티안에서 먹은 푸아그라 중 여기가 제일 고소하고 덜 기름졌습니다. 소곱창에서 곱만 딱 모아 구운 맛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하나 더 시켰고, 6.5유로 한 조각짜리를 손바닥 반만 한 크기로 받아 들고 후회는 없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바짝 긴장하던 몸이 산세바스티안에 와서 긴장이 풀리면서 맛있는걸 많이 먹었더니 컨디션이 안좋아지면서 몸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엉망진창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겨우 살아나니,  저녁은 속이 편할 것 같은 리조또가 먹고 싶어져서 다시 나갔습니다. 식욕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먹고 싶어지는 맛이 있다면 그게 이 도시 음식이었습니다.

요약: 산세바스티안의 미슐랭·랩솔 등재 가게들은 골목 핀초스 바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3~7유로짜리 핀초스 하나에도 고급 재료와 기술이 들어가 있습니다.

귀국 버스를 타던 날 아침 7시, 산세바스티안 버스터미널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출발 5분 전까지 버스가 보이지 않아 초조했지만, 갑자기 3번 플랫폼 표시가 떴고 무사히 탑승했습니다. 바르셀로나까지 8시간, 이어서 귀국행 비행기. 스페인에서 타국 서러움은 죄다 겪었습니다. 도둑도 맞고, 아프기도 하고, 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산세바스티안 며칠이 그걸 전부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스페인 미식 여행을 생각한다면, 바르셀로나보다 산세바스티안을 먼저 가보시길 권합니다. 굶으며 버티던 사람도 배가 터지게 만드는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