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삼청동에서 하루 (수제비, 전시, 삼계탕)
외국인 관광객의 90% 이상이 서울만 보고 한국을 떠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게 맞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저도 결국 서울, 그중에서도 종로로 자꾸 돌아오거든요. 이번엔 삼청동 수제비부터 앨범 커버 전시, 그리고 인삼주 한 잔까지, 꽤 긴 하루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남았습니다.
삼청동 수제비, 왜 여기만 또 오게 되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수제비에 돈을 쓰는 사람을 오래 이해 못 했습니다. 같은 돈으로 햄버거를 한 번 더 먹지,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삼청동 수제비를 처음 먹은 날부터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반죽입니다. 여기서 반죽이란, 밀가루 반죽의 두께와 쫄깃함의 정도를 말하는데 — 이 집 수제비는 혀를 세 바퀴 감은 다음에 목으로 넘어갑니다. 꿀떡 삼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삼키면 넘어가는 얇고 흐물거리는 수제비랑은 아예 결이 다릅니다.
명동에 가면 명동교자, 삼청동에 오면 삼청동 수제비. 저에겐 이미 공식이 됐습니다. 수제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혀를 세 바퀴 돈다"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바로 아실 겁니다. 반면 수제비는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 아니냐, 굳이 사 먹어야 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 저도 그 편이었으니까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해주는 집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 식감을 내는 곳이 드물다는 게 이 집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삼청동에 살고 싶어서 집을 꽤 오래 알아본 적도 있습니다. 결론은 불가능이었습니다. 작은 빌라 아니면 평창동 사모님 급 가격. 그 중간이 없더라고요. 결국 "놀러나 오자"로 정리했고, 그게 오히려 이 동네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가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앨범 커버 전시, 포토샵 없던 시대의 이야기
전시를 잘 안 갑니다. 좋아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이날은 달랐습니다. 삼청동 골목을 걷다가 분홍색 돼지가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있는 것을 봤는데, 들어가기 전까진 저도 저게 뭔지 몰랐습니다. 들어가고 나서야 이해가 됐어요.
여기서 앨범 커버 전시란, 유명 아티스트들의 음반 표지를 제작한 스튜디오의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한 공간에 모아놓은 전시입니다. 동영상 촬영은 불가, 사진만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재밌었던 건 음악 자체가 아니라 "표지를 만드는 방식"이었어요. 지금이야 유튜브 검색 한 번이면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그 시절엔 수많은 LP 앨범 중에서 표지만 보고 구매를 결정하던 때였습니다. 표지가 곧 마케팅이자 썸네일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포토샵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포토샵이란 디지털 이미지 합성 소프트웨어를 말하는데 — 지금은 하루면 처리할 합성 작업을 당시엔 한 달씩 걸려서 만들었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 스토리가 너무 재밌었어요. 어떤 그림은 앨범 음악의 내용이나 메시지와 전혀 상관없이 표지를 만든 경우도 있었고, 텍스트 하나 없이 숫자만 넣은 표지도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강렬하더라고요.
한 가지 문구가 특히 남았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사람을 어떻게 증명하지?" — 그 질문 옆에 서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주민등록증에 찍힌 숫자가 저는 아니잖아요. 그럼 나는 누구인가. 전시 하나가 인생을 돌아보는 철학 수업이 됐습니다.
- 관람 팁: 동영상 촬영 불가, 사진만 허용됩니다. 사전에 확인하고 가세요.
- 추천 대상: 사진이나 음악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밌습니다. 작업 과정 스토리 자체가 볼거리입니다.
- 위치: 삼청동·경복궁 일대 도보 코스에 포함하기 좋습니다.
서울 전시 정보는 출처: 서울특별시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삼계탕 한 그릇
경복궁 근처 삼계탕 집은 5년 만에 갔습니다. 중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외국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집은 입장하면 인삼주를 한 잔 줍니다. 먹기 전에 마셔도 되고, 먹다가 마셔도 되고, 다 먹고 마셔도 됩니다. 아니면 삼계탕에 그냥 부어 넣는 방법도 있고요. 여기서 인삼주란, 인삼을 우려낸 전통 방식의 소주 계열 술을 말하는데 — 향이 꽤 강합니다. 삼계탕 국물의 향과 섞이면서 묘하게 잘 어울렸습니다.
국물이 걸쭉합니다. 크리미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요. 정류를 갈아 넣은 것 같다는 말이 나왔을 만큼 농도가 있었습니다. 삼계탕을 딱히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여기는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5년 만에 왔는데 그 맛이 그대로였습니다.
서울이 좋다는 걸 서울에 살 때는 몰랐습니다. 여기저기 살아보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놀러갈 곳, 데이트할 곳, 먹을 것, 볼 것 — 그냥 다 있습니다. 종로구의 감성이라는 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광화문에서 삼청동으로 걷는 그 루트는 서울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길입니다.
삼청동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항상 비슷한 기분이 남습니다. 뭔가 대단한 걸 한 게 아닌데, 꽉 찬 느낌. 수제비 한 그릇, 전시 한 곳, 커피 한 잔, 삼계탕 한 솥 — 그게 전부인데, 그 사이에 분노 얘기도 했고, 슬픔도 꺼냈고, 두려웠던 밤도 다시 떠올렸습니다. 서울 어디 갈지 고민 중이시라면, 삼청동으로 오세요. 경복궁에서 출발해서 걷다 보면 길이 알아서 데려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