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다시 간 타이난 (우육탕, 망고빙수, 치진섬)
솔직히 저는 타이난이 이렇게 저를 무너뜨릴 줄 몰랐습니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실제로 숙소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그냥 울었습니다. 3년 전 이 나라에서 짐을 싸서 도망치듯 귀국했던 기억이 한꺼번에 올라왔거든요. "세계여행을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게 생기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마음으로 캐리어 가득 1년치 짐을 싸서 왔던 게 타이난이었습니다. 그때는 일주일 만에 강제 귀국해야 했고, 이후 2년을 한국에서 버텼습니다. 그리고 지금, 뭔가 조금 풀려서 다시 왔습니다.
3년 전과 지금, 우육탕 한 그릇의 온도 차이
타이난에 도착한 첫날 저녁, 숙소 근처 골목에서 줄이 길게 늘어선 식당을 발견했습니다. 메뉴판은 한자뿐이었고, 뭘 시켰는지조차 모른 채 일단 앉았습니다. 나온 건 우육탕이었습니다. 여기서 우육탕이란 소고기와 무를 맑은 육수에 끓인 음식으로, 타이베이에서 흔히 파는 진한 우육면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야채, 소뼈, 닭뼈를 7시간 끓인 육수에 감미료를 일절 넣지 않은 것이 이 집의 방식이었고, 가게에서는 "숟가락으로 탕을 먼저 드시고, 고기는 양념 없이 드세요"라고 직접 안내해 주었습니다.
소고기 볶음 하나 추가해서 둘이 먹었는데 18,000원이 나왔습니다. 3년 전에는 이런 식당에 들어갈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통장에 꽂히는 게 하나도 없을 때였으니까요. 둘 다 직장도 없고, 여행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초기였으니 외식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같은 골목, 비슷한 식당인데 그때와 지금의 체감 온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게 좀 이상하게 슬프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습니다.
타이난은 대만의 경주라고 많이들 표현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걸어 다니면서 자꾸 군산이 생각났습니다. 청나라 시대에 조성된 골목, 일제강점기 건축물, 네덜란드·스페인·중국·일본에 이르기까지 식민 지배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도시. 을지로와 인사동을 섞어놓은 골목에 빛이 예쁘게 내려앉는 오후였고, 저는 그 안에서 3년 전의 저를 자꾸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망고빙수 5,000원과 신라호텔 10만원 사이 어딘가
타이난은 대만 최대 망고 산지입니다. 그래서 여기 오면 망고를 먹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고, 실제로 먹어보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제가 먹은 건 망고 아몬드 치즈 푸딩 얼음이었는데, 가격은 5,000원 정도였습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데 당이 훅 들어오면서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며칠 전에 어느 기사에서 신라호텔 망고빙수 가격이 10만원이라는 걸 읽었습니다. 먹어본 적은 없지만 이 5,000원짜리가 더 맛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망고 자체가 진짜였고, 흑설탕 녹인 듯한 달달함에 아몬드 푸딩이 더해지는 조합이 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망고빙수의 핵심은 얼음의 질감보다 망고 자체의 당도라는 점입니다. 산지에서 먹는다는 것이 이런 차이를 만듭니다.
그날 오후에는 자전거를 빌려 안핑지구까지 달렸습니다. 여기서 안핑지구란 타이난 서쪽 해안가 일대로,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요새가 남아 있는 역사 지구입니다. 자전거는 서울의 따릉이처럼 유바이크라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데, 한 번 빌리는 데 500원 정도였고 1시간에 1,000원 남짓 나왔습니다. 해산물 가게들이 늘어선 관광 거리 자체보다, 오는 길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애들이 축구하는 것, 골목에서 오토바이 타고 퇴근하는 사람들을 스치는 게 훨씬 좋았습니다. 사람 구경이 제일 재밌다는 게 여행을 오래 다니면서 깨달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 망고빙수: 타이난 망고 산지 특성상 과일 품질이 다름, 5,000원 내외
- 유바이크 자전거: 앱으로 빌리는 공공 자전거, 1시간 약 1,000원
- 행복당 버블티: 3년 전에도 맛있게 먹었던 체인점, 지점이 달라도 맛은 동일
타이난 음식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진짜 이유
타이난에서 사흘을 먹어보고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대만은 1년을 살아도 음식 때문에 향수병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나라입니다. 동남아 음식 물가 수준인데 입에 맞는 음식은 일본이나 동남아보다 훨씬 많습니다.
타이난의 국수 한 그릇은 3,000원이었는데, 돼지고기와 해산물 육수가 섞인 맑은 국물이 나왔습니다. 약간 돼지국밥에서 느끼함을 걷어내고 오징어 육수를 합친 맛이라고 하면 가장 가깝습니다. 한국 순대국밥처럼 국물과 건더기를 따로 낼지 같이 낼지 선택할 수 있었고, 고기가 넉넉하게 들어있었습니다. 여기서 이 가격 구조의 핵심은 외식 물가는 동남아 수준이지만 숙박비는 한국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10만원대 숙소가 타이난에서는 꽤 좋은 편에 속합니다.
가오슝으로 넘어가서 들어간 춘수당은 대만 전역에 있는 밀크티 체인점인데, 여기서 파는 밀크티는 공차와는 결이 다릅니다. 여기서 춘수당이란 대만에서 버블티 문화를 처음 만든 발상지로 알려진 곳으로, 밀크티 자체의 차 향이 훨씬 진하고 고급스럽습니다. 가오슝에서 먹은 춘수당 밀크티는 지금까지 마셔본 것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국에 지점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출처: 춘수당 공식 사이트)
마지막으로 먹은 녹두 스무디는 타이난에서 먹은 음식 중 음료 부문 1위였습니다. 미숫가루를 달지 않게 탄 것처럼 고소하면서, 팥빙수 먹고 남은 국물을 갈아만든 맛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가깝습니다. 두 잔에 3,500원이었고, 줄을 서야 했는데 줄 선 사람들이 전부 현지인이었습니다. 그 집 때문에 다시 타이난에 가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나는 날 기차역에서 했습니다.
치진섬 자전거와 3년 전 나에게 하고 싶은 말
가오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치진섬이었습니다. 여기서 치진섬이란 가오슝 항구 맞은편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 자전거를 빌려서 한 바퀴 도는 것이 일반적인 여행 방식입니다. 배삯은 몇 백 원이었고, 자전거는 30분에 몇 백 원이었습니다. 화물선이 오가는 항구 위로 작은 여객선을 타고 들어가는 경험 자체가 이미 뭔가 달랐습니다.
1시간 정도 자전거를 탔는데 내내 "평화롭다"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 됐습니다. 관광지라기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동네를 자전거로 가로지르는 느낌이었고, 그게 좋았습니다. 저는 화려한 뷰포인트나 인스타그램에 잘 나오는 스팟보다 이런 순간이 더 오래 남습니다. 지진섬에서 당이 떨어진 채로 들어간 해산물 식당에서 꽃게, 조개 요리 두 가지, 공심채 볶음, 맥주까지 다섯 가지를 먹었는데 45,000원이 나왔습니다. 동남아에서 비슷하게 먹으면 항상 8만원은 나왔는데 여기서는 그 절반이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편의점에서 사온 38도 고량주를 꺼냈습니다. 원래 58도를 집었다가 죽을 것 같아서 내려놓고 38도를 샀습니다. 장어국수 테이크아웃에 비빔국수, 고량주 한 잔. 그날 누군가가 저에게 "여행은 행복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 질문에 바로 답을 못 했을겁니다.
3년 전 이 나라에서 도망치듯 돌아갔을 때, 저는 여행이 저를 바꿔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근데 타이베이에서 이미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렇게 여행을 하면 나는 안 바뀔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습니다. 여행이 직접 저를 바꾼 게 아니라, 3년이라는 세월이 바꿨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입맛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영상을 찍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걸 압니다.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딱 한 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잘 살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난은 한적합니다. 사람이 많지 않고, 골목이 조용하고, 오토바이가 많아도 경적을 잘 올리지 않습니다. 음식은 저렴하고 맛있고, 현지인들은 친절합니다. 동남아의 가격과 일본의 쾌적함을 섞어놓은 느낌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단점이 있다면 숙박비가 현지 물가 대비 높다는 것과, 한자뿐인 간판 때문에 유럽보다 오히려 파고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도시를 다시 오고 싶습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아마 3년 전의 제가 여기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