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관장 추천 문화유산 12곳 (세계문화유산, 답사기, 보길도)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답사 여행을 '공부하러 가는 여행'이라 생각해서 피해왔습니다. 그런데 유홍준 선생님의 책 한 권이 그 편견을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최근 유홍준 선생님이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되면서 그분이 꼭 가봐야 한다고 꼽은 우리 문화유산 12곳이 다시 화제가 됐는데, 제가 직접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해봤습니다.




30년 베스트셀러가 증명하는 것, 세계문화유산의 무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1993년 초판 이후 30년이 넘도록 꾸준히 팔리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여행 정보를 담은 책이었다면 진즉에 구판 처리됐겠죠.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 롱셀러가 된 핵심은 '맥락'입니다. 어떤 돌덩이 하나에도 역사적 서사를 입혀서 독자가 그 앞에 서는 순간 감동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유홍준 관장님이 꼽은 12곳 중 상당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16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종묘와 창덕궁은 1997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함께 등재됐습니다. 종묘는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인데, 신위란 돌아가신 분의 혼령이 깃든다고 여기는 위패를 뜻합니다. 단일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 건축물인 정전이 종묘의 중심인데, 정전이란 가장 중요한 신위를 모시는 중심 법당 또는 사당을 의미합니다. 왠만한 광각 렌즈로도 한 프레임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길이입니다. 

창덕궁 역시 빠질 수 없습니다. 서울에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이렇게 다섯 개의 궁궐이 있는데, 한 도시에 궁궐이 다섯 개나 있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입니다. 창덕궁 안에 있는 왕실 후원(後苑)은 예약 오픈과 동시에 1분도 안 되어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제가 직접 가을에 방문했을 때 낙엽 덮인 후원의 풍경은 진짜 한 폭의 그림이었는데, 그 어떤 사진도 현장의 분위기를 절반도 담지 못했습니다.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둘 다 가봤는데, 저는 유홍준 관장님과 마찬가지로 병산서원이 더 인상 깊었습니다. 만대루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는 장면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만대루란 병산서원 정문 격으로, 누각 형태의 개방된 마루에서 앞 강과 절벽을 감상하도록 설계된 누정 건축입니다. 현재 병산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곳이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책 없이는 지나쳤을 곳들, 답사기가 바꾼 여행의 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제주도를 네 번 다녀오면서 삼성혈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삼성혈이란 제주도 탐라국의 시조인 고씨, 양씨, 부씨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세 개의 구멍으로, 제주 문명의 기원을 담은 신화적 공간입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을 읽고 나서야 그 앞에 서는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작고 아담한 공간이지만 '여기가 제주 역사의 시작점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단순한 구멍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택 옆 추사기념관에서 실제 작품을 보면 그 힘과 개성에 압도됩니다. 건립 당시에는 53칸 규모였다고 하니 지금 남은 안채와 사랑채만으로도 당시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의 정암사는 적멸보궁 중 하나입니다.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 즉 석가모니의 실제 유골을 봉안하는 법당으로, 불상 대신 사리탑을 예경의 대상으로 삼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643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에 해당합니다.


유홍준 관장님이 추천한 12곳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묘 (서울 종로구)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실 제례 공간

창덕궁 (서울 종로구)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원 예약 필수

덕수궁 (서울 중구) — 고종의 처소, 근대 역사의 현장

병산서원 (경북 안동)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만대루 전망 압권

삼성혈 (제주 제주시) — 탐라국 시조 신화의 발원지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충남 예산) — 추사체의 고향, 기념관 병행 관람 추천

정암사 (강원 정선) — 5대 적멸보궁 중 하나

부석사 (경북 영주)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불국사 (경북 경주)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석가탑·다보탑

소쇄원 (전남 담양) — 조선 중기 대표 민간 정원

선암사 (전남 순천)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태고종 총본산

보길도 세연정 (전남 완도) —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


이 목록을 보면서 아직 못 간 곳이 선암사와 보길도 세연정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 목록 없이 여행했다면 삼성혈과 정암사는 아마 평생 무심코 지나쳤을 것입니다.


보길도에서 확인한 것, 윤선도가 왜 정착했는지


지난 5월 가족여행으로 보길도에 다녀왔습니다. 세연정은 이번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망끝전망대에서 일몰을 보는 순간 윤선도가 왜 제주도로 가다가 이곳에 멈춰섰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습니다. 세연정이란 윤선도가 조성한 부용동 원림안에 위치한 정자로, 인공 연못인 세연지를 중심으로 자연과 인공을 절묘하게 결합한 조선 최고 수준의 원림 건축입니다. 

병자호란당시 인조가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던 윤선도가 보길도 풍경에 반해 정착한 것은 51세 때의 일입니다. 그 후 85세로 작고할 때까지 13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지은 작품들이 바로 오우가와 어부사시사입니다. 어부사시사란 사계절의 어부 생활을 읊은 연시조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담은 조선 시가 문학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5월의 일몰은 사진으로 보면 그냥 예쁜 정도인데, 실제로 서 있으면 말이 안 나옵니다. 해가 수평선으로 떨어지면서 앞에 놓인 섬들의 실루엣이 검게 변하는 그 20분이 여행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여행에서 가장 솔직해지는 때입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보게 됩니다.


보길도는 해남 땅끝마을에서 완도 노화도를 거쳐 들어가야 하는 섬이라 접근성이 낮은 편입니다. 그래서 여름 성수기에도 제주도나 동해안처럼 붐비지 않습니다. 인구감소지역 반값여행 기간에 맞춰 방문한다면 더욱 합리적이면서 뜻 깊은 여행길이 될 것 입니다.